서정신, 『한국에서의 성별낙태에 대하여』, 철학과 현실, 20('94.3), pp.217∼225,


1. 들어가는 말
〈사례 1〉유엔이 발간하는 인구와 발전 리뷰는 91년 한국의 남자아이 출생빈도가 중국과 함께 세계 최고임을 밝히고 있는데 첫 아이의 경우 남녀 성비율이 1백 명의 여아 출산시 남아 1백 10명 이하인데 비해, 둘째, 즉 딸 하나를 갖고 있는 경우 남아 출산 1백 30명 이상, 셋째 출산의 경우는 170명 이상, 넷째 출산의 경우는 2백 명에 이르고 있다. 자연적 출생비율이 여아 1백 명 출생시 남아 106명임을 감안할 때, 첫째 출산을 제외한 경우들에서 인위적 조작이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사례 2〉이씨 부인은 아들을 꼭 가져야 하겠다는 남편의 소망과 그가 최악의 경우 다른 여자를 보아서라도 아들을 낳겠다는 협박에 못이겨 네 번째 임신을 했고 그 결과 네 번째 딸을 낳았다. 두 부부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준 이 갓난 여자아이의 "잘못된" 성별을 오랫동안 이웃 부인들의 화제거리고 남았는데 그들의 관심사의 하나는 왜 이 씨부인이 "네번째에도 딸을 낳는" 잘못을 범했는가였었다. 그들의 궁금증은 물론 이 씨 부인이 성별감별에 의한 낙태의 기술을 왜 사용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사례 3〉얼마전 우연히 만난 고등하교 동창생은 서울 근교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한 달 순수입이 오천만 원을 상회한다고 밝혀 최저생활비도 못버는 시간강사는 물론 어엿한 은행간부 동창생의 부러움까지 샀다. 그런데 현재 그가 소유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소위 의료행위의 상당부분이 낙태이며 그중의 많은 부분이 아들을 낳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여자태아 낙태임이 드러나자 그 친구에 대한 부러움은 탈색, 축소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떤 의미에서 여자 태아의 선별적 낙태(이하 성별낙태)는 우리가 인생의 내용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 현대문명이 제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며 다른 문명이 기재들과 마찬가지로 금전으로 구입할 수 있는 하나의 서비스이어서 윤리적 비판의 여지가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여성이 가능 존재로서의 여성집단을 단지 그 가능집단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면에서 성별낙태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즉, 하나의 집단적 선택으로서의 성별낙태는 한 성별집단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성별 집단에게 존재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뿐 아니라 태아라는 존재가능 상태에서도 존재의 말살을 선택한다는 면에서 여성에 의한, 그러나 여성에 대한 성차별의 극명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에서의 성별낙태를 서구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성의 낙태권 쟁취노력―"여성의 몸에 대해서는 여성에서 권리를"이라는 여권론자들의 구호에서 대변되는 노력이라는 문맥에서 볼 때는 일단 낙태권이 행사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여성자율의 이상적 권리행사인 것 같으면서도 서구 여성운동이 구하려 해왔던 목표로서의 성차별 없는 사회와의 연관에서는 오히려 여성의 자율권의 포기이며 오히려 성차별을 영구화하는 방향으로의 행위라는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러나 이 성별낙태라는 반여성적 현실이 그 표피적 형태와는 달리 여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성차별만으로는 평가될 수 없으며 더 광범위한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낙태권의 옹호와 여권운동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져왔으며 또 갖고 있는지를,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낙태의 정당화가 가능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여권운동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2. 여권운동과 낙태권의 상호관계

확실히 성별낙태는 한국의 여권운동가들에게 뜨거운 감자가 될 소지를 지니고 있다. 미국 등 서구기독교 문화권의 경우 종교계를 중심으로 반낙태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어 낙태전문클리닉 등의 시설들이 일부 극단주의적 반낙태주의자들에 의해 점거되거나 심지어는 방화, 폭파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낙태를 하려 하는 많은 여성들이나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여권론자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의료법의 허술함 속에서 법적 처벌의 실제적 위험이 없이 낙태가 비교적 쉽게 시술되어 왔기 때문에 낙태현상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자칫하면 반낙태주의에 대한 긍정적 수용으로 비추어져서 여성의 낙태권을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한다. 반면 여권론자들이 우리 사회의 낙태현상에 대해 침묵만 하고 있는 경우는 여권론자들이 성별낙태를 비롯한 낙태현상의 부정적 측면까지도 옹하고 있다는 인상을 불식시키기가 어렵게 된다. 현실적으로 수많은 성별낙태의 결과로 아동의 남녀 성비균형이 깨지게 되고 증가일로에 있는 일반낙태나 성별낙태의 통계 수치가 언론에 보도됨에 따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낙태반대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하는 상태에서 여권론자들의 침묵은 단기적으로는 낙태권 행사의 옹호라는 전략상의 이득을 취하게 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여권론자들이 낙태문제에 대해 일관된 윤리적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는 비판적 지적을 감수해야 하는 불이익을 당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낙태권의 옹호와 여권운동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져왔으며 또 갖고 있는지를,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낙태의 정당화가 가능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는 여권운동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으나, 필자는 그 궁극적 목표가 소극적으로는 우선 차별 받지 않고 종속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확보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또한 이 궁극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구체적 목표들은 현재 여성들이 처하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경제적인 불이익의 구체적인 상태들을 하나하나 해소해 나가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차별받지 않고 종속되지 않는 존재란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곧 자주적, 자율적인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어 노예들은, 그들이 이씨 조선 시대의 노예였건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의 흑인노예이었건간에 상관없이, 차별받고 종속되는 존재였다. 그들은 자신에게 태어날 자녀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인지조차 결정할 수 없는 비자율적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자율성이 단순히 차별이나 종속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속성만이 아니고 그보다 더 앞선 상태의 속성임에 유의해야 한다. 이조시대 양반계급의 남녀들은 노예처럼 종속되거나 차별받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누구와 결혼할지를 결정할 수 없었으며 혼례가 끝난  뒤에야 그들의 배우자를 처음으로 만나보게 되었었다. 자신의 배우자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그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자율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조시대의 사람들과는 달리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는, 남자이건 여자이건, 우리 생활의 내용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율적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특히 남성에 종속되고 차별받는 삶을 살아왔던 우리 사회의 여성들에게 자율성의 획득이라는 목표는 궁극적이고 적극적인 목표일 것이다.


자율성이 여권운동의 적극적인 목표임을 인정할 때, 이제 왜 여성이 낙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국가나 배우자, 부모에 우선해서 여성 자신에게 귀속되어야 하는지를 자율권과의 관계에서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최소한 현재의 의학기술의 테두리 안에서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과정은 전적으로 여성의 몸안에서 일어난다. 그뿐만 아니라 출산 이후의 육아까지도 거의 전적으로 여성의 책임하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사건이든지 그 사건의 결과가 중요하고 심각할수록 우리는 그 사건이 우리에게 타율적으로 주어지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그 사건을 받아들일 것인지의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조시대의 젊은이들의 경우 그들에게 결혼이라는 사건이 유발하는 막대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사건을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그들이 자율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여태까지의 여성들에게 임신이라는 사건이 유발하는 막대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들이 자율적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여성의 육체상태와 건강과 생활의 내용까지도 바꾸게 하는 사건으로서의 임신과 출산은 여성이 지게 되는 막대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자유롭게 선택, 결정할 수 있는 일이 되어 오지는 못했다. 미성년자의 경우 의학적인 무지에 의해서, 혹은 주위에서의 폭력에 의해서, 성인 여성의 경우에도 피임에 대한 무지나 안전하면서도 확실히 피임방법이 결여된 현실 때문에, 혹은 폭력에 의해서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임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임신들을 9개월간의 임신과정, 그리고 더욱 막대한 결과를 가져올 출산으로까지 이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선택으로서의 낙태는 법으로, 종교와 관습으로 금지되어 왔었다. 여성이 원하지 않는 임신과 그로 인한 출산의 부담을 지게 되는 비자율적 상황은 여권운동가들로 하여금 "여성의 몸에 대해서는 여성에게 권리를"이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고 그 결과로 낙태권리의 여성귀속, 즉 국가, 종교, 그리고 관습에 의한 여성의 육체에 대한 간섭의 배제를 주장하게 되어온 것이다.

3. 생명에 대한 논쟁

 여성을 자율적이게 하자는 주장의 당위론적인 설득력과는 달리 그를 위한 방법으로서의 낙태권 옹호는 특히 기독교 문화권에서 많은 반대에 부딪혀 왔다. 왜 일까? 그것은 물론 결혼의 선택과는 달리 임신계속 여부에 관한 선택으로서의 낙태가 태아라는 생명체(혹은 잠재적 생명체)의 제거라는 사건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에서 피임을 금지하고 있는 이유가 생명의 잉태와 탄생은 신의 의지에 있다는 교리적 믿음에 기인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구체적으로는 정자나 난자 역시 잠재적 생명체의 구성요소인 만큼 인간의 의지에 의해 그 잠재성을 조작할 수 없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면, 태아의 생명체적 잠재성에 대한 불가침의 원리는 피임을 금하는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태까지의 반낙태주의의 논의는 대개 태아의 생명체로서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온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법률에 의해 합법적으로 낙태가 허용되는 기간을 수정에서 출산에 이르는 기간의 제1삼분기(the first trimester)에 국한하고 있는 것도 그 기간까지의 태아가 가장 비독립적인 생명체라는 입장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논의의 이면에는 다른 함축,즉 태아가 독립적인 생명체이면 혹은 충분히 복잡한 구조와 기능을 갖고 있는 생명체이면 낙태는 살인행위이므로 어느 경우에도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져 있다. 이 함축된 주장(이하 생명반론)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낙태주의자들은 의학적 자료를 동원하여 제1삼분기 이전의 태아조차도 충분히 복잡한 구조와 기능을 갖고 있는 인간 생명체임을 강조해 왔다. 그들이 사용한 예로서는 8주된 태아가 태내에서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라든가 낙태시술 당시 흡입방법에 의해 제거되는 태아가 고통을 경험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비디오 필름 등이 있다. 이 자료화면들은 물론 임신초기의 태아들조차도 독립된 인간생명체이기 때문에 낙태는 살인행위라는, 그래서 낙태는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반낙태론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생명반론에 대한 여권운동가와 낙태찬성론자의 대응방식도 여러 유형이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생명반론처럼 의학적인 자료를 동원하여 어느 시기까지의 태아는 독립된 인간생명체로 볼 수 없음을 밝히려 하는 방법이다. 이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은 태아가 부분적이나 전적으로 독립적인 인간생명체이다라는 생명반론의 전제를 최대한치 받아들인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여성의 권익이나 임신여성의 자율성이라는 가치가 생명체로서의 태아가 갖는 권리를 상쇄할 수 있으며 그런 경우에 낙태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전략이다. 이 두 번째 대응방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득력과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여권론자가 반낙태주의들에 의해 반생명적으로 낙인 찍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태아의 생명체로서의 가치를 비록 신성불가침한 것으로는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임신여성의 생명가치나 여타 그 여성에게 중요한 가치들과 비교가 가능한 상대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낙태가 고려되지 않은 일반 임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낙태의 경우에도 태아에게 생명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면에서 우리가 일관성을 유지하게 해준다. 둘째는 태아의 생명체로서의 가치를 임신여성에 관련된 다른 가치와 비교가능하게 함으로써 실제상황에서의 결정이나 판단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반론을 전쟁이라는 윤리상황에 도입해 보면 전쟁은 곧 살인행위이며 그에 따라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많은 전쟁의 경우 우리가 적군의 생명의 가치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켜야 할 다른 가치와의 갈등 때문에 불가피하게 전쟁이라는 선택을 하는 것을 상기할 때, 생명반론이 실제의 전쟁상황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거나 판단하는 데에 있어서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못함을 드러내준다. 낙태의 경우도 태아의 생명체로서의 가치가 다른 가치들과 상충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낙태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각각의 경우마다 갈등되는 가치간의 비교에 의해서 개개 낙태의 경우가 윤리적으로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이 대응방식에 의해서 이제는 태아의 기능적, 구조적인 복잡성이 인간생명체의 속성을 아무리 갖추었다고 해도 그 태아를 계속 임신하고 출산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육아의 책임과 의무를 지는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 그 임신여성의 자율적인 삶을 파괴할 여지가 있을 때, 그 임신여성은 최대한 빨리 그 임신을 중단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하며 동시에 사회는 그 기회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된다. 이 입장을 변호하게 하는 가장 손쉬운 예는 임신부의 생명이 임신에 의해 위협받는 경우와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이다. 자신의 생명과 태아의 생명이 갈등관계에 있을 때 임신부는 정당방위의 차원에서 종교적 교리와 상관없이 낙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극단적인 경우들이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여권운동이 변호하고 보호하려는 여성의 낙태권리는 태아의 생명체로서의 가치에 대한 무시나 외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가치와 우위비교되어서 지켜져야 할, 여성에게 소중한 다른 가치들 ―그 가치와 우위 비교되어서 지켜져야 할, 여성에게 소중한 다른 가치들―임신여성의 생명, 건강, 자율성, 자기존엄성 등―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4. 한국적 상황과 성별낙태

태아의 생명체로서의 가치에 우위비교되는 가치를 기준삼아 여권론자들이 낙태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면 한국에서의 성별낙태는 왜 정당화될 수 없는가? 한국의 여성은 아들낳기의 가치에 의해 여자 태아의 성별낙태를 정당화할 수는 없는가? 혹자는 아들이 꼭 필요하고  임신여성을 위시한 모든 가족구성원이 남자아이의 출생을 바라는 상황에서 남아를 선별임신하는 것의 가치가 성별낙태되는 여자태아의 생명체로서의 가치를 압도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되물을 수 있다. 남아선호 사상에 기초한 아들낳기의 바램이 여성에게 윤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내포하는가? 그리고 그 가치가 태아의 생명체로서의 가치에 상대적 우위를 갖는 가치인가?

물론 관습과 편견이 한 사회안에서 가치로 자리하고 그 사회의 밖에서는 문화적 상대주의라는 미명하에 용인되는 현상이 존재하며 또 존재해왔다.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전 세계 회교국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여성의 외음부절제시술(혹은 여성할례)이 성적쾌락을 추구하지 않는 여성을 만들어내는 의식으로서 공인되고 이 시술을 받는 것이 참된 여성의 미덕인양 인정되면서 생후 9개월밖에 안된 아기에서부터 사춘기 직전의 소녀에 이르는 여성들이 매해 수백만 명씩 외음부를 도려내는 고문을 당하고 있다. 미국 흑인 소설가 앨리스 워커와 아프리카 여권운동가들에 의해 반대운동과 계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여태까지의 전통적 가치는 어느새 여성에 대한 집단적, 종교적 박해로 재해석되어 가고 있다. 여성을 억업하는 제도나 장치는 그것들이 아무리 그 사회나 문화권에서 미화된다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여성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를 내포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우는 하나의 사례라 하겠다.

한국의 수많은 젊고, 그리고 매우 현대적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들이 성별낙태를 감행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하는 아들낳기라는 가치 역시 우리의 뿌리깊은 남아선호 사상이 여성들에게 강요해 온 사이비 가치(pseudo-value)일 뿐이다.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들을 칠거지악이라는 규율로 처벌하고 축첩제도, 씨받이 등의 장치가 횡행해 온 전통이 아직도 완전히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억압이나 처벌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아들낳기는 분명히 우리 여성들에게 실용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치는 비자율적인 존재에게 일시적 편의를 제공하는 것일 뿐 잠재적 인간생명체의 제거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자율적인 여성이 간절히 추구하는 가치일 수는 없다. 마치 여성할례가 참된 여성의 미덕을 보여주는 사회장치일 수 없는 것처럼, 여성을 보다 자율적이게 하기 위해 필요한 가치들 가운데에서 사이비 가치들이 자리하지 못하도록 여성 자신들의 비판적 각성이 보편화될 때, 그리고 이각성을 사회 전체가 받아들일 때, 한국사회는 비로소 성별낙태의 천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