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필홍, 『낙태주의』, 고원, 1999


Ⅰ.

낙태(abortion)에 관한 견해는 낙태행위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두 가지 입장이 있을 뿐이다. 제3의 안은 없다. 이 논문에서 나는 세가지 이유로- 즉 자치(self-goverment ),이성(reason), 유용(utility) 따위-낙태는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낙태행위허용을 지지함에 있어서 어떤 증명적 결정적 근거들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며 낙태문제 해결을 위한 보다 합리적인 어푸로우치로서 나의 주장은 그 의의를 갖는다. 본래로, 철학이 관심하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 답에 이르는 과정이다.

현대사회윤리의 여러 문제 중 낙태문제보다 더 논쟁적인 것이 좀처럼 있을 것 같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로 낙태라는 이슈 자체가 우리 나름의 정서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이 낙태문제가 성별이나 동등권, 프라이버시 그리고 도덕, 법, 종교 등의 현대사회의 주요한 여러 관심사에 심도 있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보다 구체적으로 임신 여성의 몸 속의 태아(fetus) 또는 배자(embryo)를 [보다 엄격하게는 정자(spermatozoon)와 난자(ovum)가 결합해서 형성되는 단세포 단계의 단순한 배자(embryo)와 팔, 다리 등을 갖춘 정상개체로서의 복잡한 태아(fetus)로 나누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으나 이런 따위의 구분은 이 글에서 나의 관심 밖이어서 태아로 통칭한다] 인간으로 볼 수 있느냐 또 있다면 어느 시기부터 인간으로 보느냐 하는 데 대해서 이견자들 사이의 합의를 도출해 낸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좀더 부연하면 낙태는 결국 생명문제, 즉 생과 사의 문제에 직결되기 때문에 우리의 정감을 민감하게 자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개인의 도덕과 공공의 정책이, 개인의 권리와 국가의 권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낙태문제이다. 그러나 낙태주의자(abortionists)와 [Abortionists는 낙태주의자, 낙태지지자, 낙태찬성론자 등의 번역이 있을 수 있으나 실질적 내용을 고려해 본다면 낙태허용주의자가 가장 적합할 것 같다. 왜냐하면 Abortionists는 낙태를 적극 지지하거나 찬성하거나 권장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아니라, Anti-abortionists가 어떤 경우에도 낙태금지를 고수하는 데 비해서,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낙태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있기 때문이다] 반낙태주의자(anti-abortionists) 사이의 가장 첨예한 싸움은 태아의 위상(the status of the fetus) 문제에서 비롯된다(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낙태에 관한 일반론일 뿐 나는 적어도 이 논문에서는 여기에서 얘기되는 의미로서의 태아의 위상문제가 낙태주의자와 반낙태주의자 사이의 가장 본질적인 대립을 가져온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임이 여성의 임신 순간부터 시작하는가 또는 출산 이후에나 가능한 것인가 또는 태아가 임신자의 몸밖에서도 임신자에 의존치 아니하고 어떤 방식으로 생존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어느 특정한 시기부터인가 하는 물음에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실로 어려운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임 또는 생명체임이 일련의 생물학적 사실들만을 검토함으로써 쉽게 결정되거나 밝혀진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에는 여러 가지 입장이 있는 셈이다. 인간의 유전인자의 형성만이 인간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수정되는 순간 태아는 인간이라든지, 임신(conception)이 어느 정도 경과 후 태아가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식으로 환경과의 교호작용을 통해서만이 인간으로서 실현이 가능하다든지, 아니면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준하여 태아의 인간 여부가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따위이다.

되레 낙태문제에 관한 보다 적극적 논의는 주로 생명의 가치와 선택의 가치 사이의 충돌에 관한 것이다. 즉 낙태반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태아의 생명에의 권리와 낙태허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임신자 자신의 선택에의 권리가 갈등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낙태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태아를 여성의 신체의 일부로 간주하며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강조하는 입장에서 여성자신의 신체를 통치하는 권리를 주장하여 자신의 선택권리를 선호하는 입장(pro-chocie)을 지지하고 있으며, 반낙태주의자들은 태아를 새로운 생명체로 이해하며 구체적으로 태아의 생명가치를 존중하고 강조하여 낙태를 가히 살인행위로 간주한 나머지 생명을 선호하는 입장(pro-life
)을 고수하고 있다. 말하자면, 대비적으로, 낙태주의자들은 태아를 임신자의 신체의 일부로 이해하기 때문에 임신자 자의로 필요하다면 태아의 생명에 손댈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반낙태주의자들은 태아가 임신자와 다른 새로운 생명체라는 생각을 기본적 전제로 받아들이는 탓으로 임신자가 태아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어느 한편에도 어떤 결정적 우세가 주어지지 못하는 것은 낙태에 관한 어떠한 명확한 일반적 도덕적 판단이 또한 주어지지 못하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점이 더욱 논쟁적으로 철학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듯 낙태에 관한 두 입장이 상반하고 있으나 법적 낙태찬성론자들과 법적 낙태반대론자들이 가장 설득력 있게 변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쌍방이 관심 갖는 그들에게 던져진 문제-주로 윤리적 갈등의 문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태아가 한 인간존재임을 어떻게 증명하고 결정할 수 있는가? 태아는 언제부터 지각능력을 갖추게 되는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권리와 관련하여 임신 여성의 권리는 어느 정도가 적절한 것이며 또 그 한계는 무엇인가? 상황에 따라서는 도대체 누가 한 여성에게 그녀가 원치 않는 임신을 계속하라고 강제할 수 있는가? 임산부가, 또는 그 밖의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임신의 어느 단계에서 무슨 이유로 태아의 생명 연장을 종식시킬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은, 갖게 된다면, 도대체 어떤 상황인가? 한 여서의,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한 인간의 판단이나 결정을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가? 아까 지적하였듯이 낙태허용을 고려해 보아도 우리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생명에의 권리를 인간존재에 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출생시키기부터? 태동시기? 임신시기부터? 그러나 출생시기와 태동시기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임의적이다. 그 어느 시기도 존재의 발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명쾌한 구획의 선을 그어 주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어나기 바로 전의 한 개인 존재와 태어난 바로 직후의 존재 사이에 인간능력의 관점에서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발달단계에 있어서 태아가 유아나 어린아이 못지 않게 잠재력이 있는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생명에의 권리를 부여하는 그 중심 준거가 사람임을 갖추게 되는 전망이라면 그런 잠재력을 가지는 어떠한 존재도 권리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한다. 그럼 다시,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가? 가장 적절한 것이 임신시기가 될 것인가? 임신 전에는 적절한 관심과 배려가 주어지는 경우 사림이 되리리고 기대될 수 있는 존재가 있지 아니하다. 그러나 임신 후에는 그런 가능성의 존재가 존재한다. 이 상황이라면 비록 태아가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구체적 권리를 향유하기에 필요한 제반능력을 결핍하고 있으나 그의 생명이 생명체에의 권리로 표시되는 여러 수준의 고려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찬성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비해서 단순하다. 즉 인간의 생명은 임신과 동시에 시작하기 때문에 태아도 여느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명에의 권리(right to life)를 갖게 되면 인간 생명체를 죽이는 것이 살인이듯이 낙태 또한 죄 없는 사람을 살인하는 행위인 것이다. 여기에 비해 낙태주의자들은 인간생명체가 임신의 순간과 함께 시작하기보다는 대체로 일정시간이 지나면서 시작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지적 하였듯이 임신(conception)과 유아(infancy)사이에 임의성을 넘어선 어떤 과학에 기초한 명확한 선을 그어 그 선 이전의 어떤 존재도 결코 인간생명체가 아니며 그 선 이후의 모든 존재가 인간생명체라고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와 같이 낙태주의자와 반낙태주의자 사이의 싸움이 쉽게 마무리 될 것 같지 않다. 더하여 낙태논쟁은 이런 신체적이거나 생물적인 데서 그치지 아니하고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문제와도 깊게 관계되어 있으며, 오히려 후자의 경우, 논쟁의 열기가 더 뜨겁다하여도 과장이 아니다. 태아가 생물적 의미(biological sense)에서 인간이냐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긍정적으로 납득이 갈 수 있으되 태아가 도덕적 의미(moral sense)에서 인간이냐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의혹을 제기할 수 있다. 생물적 의미에서 적합한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인간이라 했을 때는 태아뿐만이 아니라 늙어 망령든 사람이나 사고로 혼수상태에 있는 사람마저도 모두 인간이다. 그러나 도덕적 의미에서 보았을 때는, 즉 예를 들어 I.Kant의 도덕적 행위주체자의 능력으로 평가되는 합리성, 행위의 통제능력, 자의식 등을 갖추고 있느냐는 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즉 그런 도덕적 능력까지 포함하여야 인간임을 얘기할 수 있다고 보았을 때는, 적어도 어느 시기의 사람이라 단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Ⅱ.

낙태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낙태주의자로서, 태아가 생명체 즉 사람임을 인정한 경우라도 생물적 의미에서 뿐만이 아니라 도덕적 의미에서마저도 인간임을 인정한다 하여도 한 여성이 그 태아를 꼭 낳아야 할 도덕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입장이 존중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결국 낙태문제는 두 개의 권리 즉 태아의 인간권리와 임신자의 인간권리의 대결로 집약되는데, J.J. Thomson이 그의 논문 "낙태를 변호함(A Defense of Abortion)"에서 지적하듯이, 무엇보다도 나의 몸은 내가 누구보다도 우선적으로 통치한다는 점에서 한 여성 자신의 신체에 발생하게 되는 일에 대해서 갖는 자기자신의 통치권리가 태아의 그 어떤 권리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항상 태아는 생물적 의미에서만 인간일 뿐 합리성 등을 갖춘 도덕적 의미의 인간으로 볼 수 없는 경우는 태아는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에 "나"의 권리를 갖고 있지 않으나 임신자는 "나"의 선택권리를 갖기에 이 권리는 태아에 대한 어떠한 배려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신여성이 태아를 낙태키로 선택한 것은 그녀의 한 신성불가침의 도덕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나의 이런 입장은 다분히 자유주의(liberalism)에 기초하고 있다. 이를테면 공동체주의자(communitarians)는 임신자의 낙태결정은 임신자 자신의 결정이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가정과 자신의 사회공동체의 전통, 관행, 역사가 결정해 주리라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서양 사회보다 공동체 중심 사회인 우리 한국사회에서 낙태논쟁이 덜 심각한 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나 실제 생활하는 사람들만이 권리와 관련한 논의에 관련되며 태아는 실제 사람으로 자격이 (적어도 도덕적 의미에서는) 부여 될 수 없기 때문에 권리를 갖지 못하며 그러므로 임신자가 갖는 선택의 권리가 그 무엇보다 우세하다는 낙태허용을 긍정적으로 고려하는 일군의 낙태주의자들에 대한 공격 또한 만만찮다. 사고로 인하여 의식불명의 상태에 있으며 의식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경우라면 조금 덜한 논란의 대상이 되겠으나, 예를 들어 현재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이라든지, 교통사고후 일정기간 무의식 상태에 있으나 조만간 의식회복이 기대되는 사람이라든지, 무술로 신들려 있는 사람 등은 합리적 추론의 기술이며 자신의 생명을 통치할 능력이며 의사소통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때문에 실지의 사람으로 간주될 수 없으리라고 다그친다. 따라서 명백한 것은 권리를 갖기 위해서 우리가 사람이기 위한 능력이 실제로 현재 존재하여야 하며 또 발휘되어야 하는 상태에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반낙태주의자에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인간의 모든 권리를 갖는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낙태는 혹 임신부의 생명이 위태롭거나 유전적 하자로 생후 기형아(deformity)의 가능성이 높거나 강간(rape)이나 근친상간(incest)의 경우를 무론하고 생명에의 외경에 대한 위험한 도전으로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만다. 보수적 종교집단 특히 상징적으로 카톨릭 교회가, 최근 교황이 낙태의 부당성을 새롭게 강조하였듯이, 이와 같은 입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논점은 어디까지나 권리들이 갈등하는 경우 - 선택의 권리와 생명의 권리 - 의 우선순위(primacy)의 문제다. 그러므로 의식불명자, 수면자, 신들리자 또는 태아에게 권리(생물적 권리거나 도덕적 권리거나)가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가 못된다. 요지는 혹 그들에게 생명에의 도덕적 권리를 인정한다 해도, 보다 구체적으로 태아에게 도덕적 권리가 주어져도 무엇보다도 임신자의 권리를 압도하거나 능가(outweight)할 수 없으며, 또한 두 권리가 충돌하는 상황을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아닌 임신자라는 점이다. 따라서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어 사람이 될 미래의 전망이나 일정기간의 의식불명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미래의 온전한 사람이 될 전망은 같다든지, 적절한 관심을 보여 주고 보호해 주면 다 사람이 되는 것이라든지,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존재 즉 그들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며 비록 그들이 사람이 아닌 상태에 있거나 아직 사람이 아닌 상태에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이 점이 실제 사람들의 생명이 생명에의 권리와 더불어 보호되어야 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태아류의 생명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을 정당화시켜주고 있다는 주장은 분명히 논점을 빗나가고 있다.

낙태주의자들에 대한 반대는 여기서 그치지 아니한다. 선택에 비하여 생명이 상대적으로 우세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선택의 권리보다는 생명의 권리가 더 크고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에 생명의 권리가 우선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이 두 권리가 충돌하면 생명이 우세하게 되며 그러므로 태아의 낙태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과 선택이 갈등을 빚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드물지 않게 낙태의 경우 선택과 생명의 충돌은 대개 생명과 생명의 충돌이 되게 마련이며 또는 선택 또한 생명을 위한 선택이기에 선택과 생명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생명의 권리가 선택의 권리보다 더 크고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에 생명의 권리가 우선하여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적절한 예를 들어보자. 태아를 분만시키고자 하면 어머니의 생명이 극도로 위험한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 경우는 선택과 생명의 대결이 아니라 이미 생명과 생명의 대결구도가 되어 있다. 태아의 생명권과 어머니의 생명권 사이의 갈등이다. 또 이 경우 어머니가 낙태를 선택한 경우라도 이 선택은 이미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선택이거나 또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태어난(태어난다는 보장이 확실치 못하나) 아이의 생명에 대한 위협과 불안을 막아보려는 고뇌에 찬 결단이고 보면 어머니의 선택은 곧 생명을 위한 선택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도 선택이 보다 무게 있게 고려되어야 하는 경우들이 있다. 개개인이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많은 희생을 대가로 치러야 할 때 특히 그러하다. 낯선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치료를 위하여 개개인의 저축이나 그들 수입의 일부라도 소모되는 것은 강요받지 아니한다. 남을 돕는 그러한 결정은 어디까지나 개개인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생명권이 선택권 보다 우세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은 못된다.


낙태허용은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일개의 낙태허용주의자로서 임신자의 선택의 권리에 보다 큰 비중을 두는 또 하나의 다른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의 하나로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한 신뢰할 수 있는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이며 이 능력은 또한 무게 있게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성숙한 이성적, 합리적 존재의 선택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선택을 존중한다는 것은 개개인을 대함에 있어서 단순히 위협이나 강제를 피하거나 배제하는 것 이상의 많은 것을 포함한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총체적으로 그리고 가장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판단하며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사회도 정부도 이웃도 아닌 바로 나 임신자 자신인 것이다. 자기 몸에 발생하는 일에 관한 결정보다 더 중요한 결정이 개인에게 무엇이 있겠으며 자신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자 또한 누구이겠으며 그것을 바로 자신이 아닌 그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임신자의 자기선택은 너무 당연하고 가장 타당하다.

물론 인간 이성능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임신여성의 이성적 판단 능력을 그토록 신뢰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임신여성의 낙태결정이 잘못될 수, 적어도 최선이 아닐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혹이다. 더더구나 전통적으로 개인의 주관이나 판단보다는 공동체가 제시하는 전통이나 권위 따위에 보다 익숙한 우리들에게서 이성능력을 높이 신뢰하고 그로부터 고뇌에 찬 성숙한 판단을 기대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한 예를 들자면, 남성 선호사상에 젖어있는 우리가 그래서 태아의 성을 미리 구별해 여아의 경우는 죽여 버리고 남아의 경우만 출산하는 우리에게 과연 자의의 이성적 선택권(right to choice)을 마냥 주는 것이 정작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물론 인간 이성 능력에의 신뢰와 조회가 이 비판들을 다 완벽히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러나 낙태허용을 지지하고 낙태허용을 위해서는 임신자의 선택을 존중하여야 하며 임신자의 선택은 그녀의 이성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가장, 적어도 보다 보편타당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낙태주의를 뒷받침해주는 또 다른 하나의 아이디어는, 응용 윤리 분야에서 널리 통하여 개인권리라는 생각과는 주로 상치하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라는 입장이다. 공리주의는 여느 응용윤리분야에서처럼 낙태에 관한 어떤 확실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낙태가 유용성(utility)을 극대화시키는 경우는 허용되고, 유용성을 극대화시키지 못하는 경우는 허용되지 않는다. 낙태의 유용성과 유용성의 극대치는, 낙태가 관계되는 여러 가지 경우와 상황이 있을 수 있으나 여하튼 어떤 경우에는 낙태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공리성이 낙태주의를 이론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은 논리적으로 분명하다. 적어도 낙태주의는 공리주의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Ⅲ.

낙태허용에 관한 논의는 현대사회윤리문제 중 가장 논쟁적이다. 그 논쟁은 결국 낙태허용주의자 사이의 선택권리와 생명권리 사이의 우선 다툼으로 귀착된다. 낙태허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생명은 이미 임신에서부터 시작하였으므로 낙태란 불가하며 태아의 생명에의 권리는 여느 일반의 생명처럼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보수적이고 비교적 단순하다. 이에 비해 낙태허용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다종다양하다. 나는 이 논문에서 반낙태주의자를 반대함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자유주의(또는 개인주의 또는 원자주의)의 입장에서 두 가지의 - 서로 독립적으로 중요하면서도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는 - 이유 있는 반항을 하고 있다. 또 공리주의로부터 낙태허용의 논리적 귀결을 도출시키고 있다. 첫째로 인간이 또는 한 여성이 갖는 자기 신체에 관한 자기 선택적 통치권리(self-governing power)는 그 누구도 방해하거나 간섭할 수 없는 또 그 어떤 이해관계와도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양도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며, 자유주의 또는 개인주의의 전통에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언명 외에 인간은 생명에의 권리, 자유에의 권리,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 등 그 누구에게도 이양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그의 창조자로부터 본래 부여받았다는 점 등을 증명이 요구되지 않는 자명한(self-evid
ent) 진리로 받아들인다. 물론 이 진리 자체의 정당성을 문제삼는 것이 불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프랑스의 한 여류자가가 얼마 전에 마약복용으로 구속되면서 "나는 나의 몸을 황폐화시킬 자유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처럼 인간은 자기 신체에 대해서 과연 완벽한 자유와 권리를 갖는가?

둘째로 인간이 신뢰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으로서의 인간이성(human reason)을 행사함에 있어서 한 여성이 낙태선택문제와 관련하여 존중되어야 하며 그 결정에 있어서 또한 그녀가 그 누구보다 가장 적합한 상황에 있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낙태허용을 주장함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주장 외에 임신자 자신이 갖게되는 조건과 그 사회의 전통이나 관습, 실행, 종교, 인구폭발 따위를 유용(utility)과 관련하여 고려하는 일은 별개의 다음 다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