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수, 『개혁과 민주주의』, 교육과학사,1996


생명보호와 형법(pp.169~170)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이 생명은 각 사람이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각자에게 고유한 것인 만큼 남에게 빌릴 수도, 빌려줄 수도 없는 것이다. 생명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 실존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될 수 없다.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이 지고한 인간생명을 불가침, 불가양의 권리로 승인하는 데서 모든 법질서가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헌법상 생명권에 관한 명문규정은 없지만, 그것은 신체의 자유의 당연한 전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가치의 핵심으로 삼는 헌법의 기본권질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이 전제되지 않은 자유와 권리, 인간의 존엄성 등은 공허한 개념에 불과할 뿐이며 각종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질서내에서 생명권은 명문규정 유무에 관계없이 당연히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된다.

법익보호를 주된 임무로 삼는 형법질서내에서 모든 법익 중 최상위의 법익에 해당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다. 인간의 생명은 신체의 완전성, 자유, 명예, 재산 등 어떠한 가치있는 것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생명은 법익피라미드의 정점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인간이 논리적 인격의 주체로서 자유로운 발전을 지향하며 스스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생명보호절대의 원칙). 법의 숭고한 도덕성은 사람의 생명을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말고,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하는 데 있다. 그럴진대 각자의 생명은 그것 자체로 고유한 존재가치가 있어 상하귀천에 차등이 있을 수 없고 타인의 생명과 비교교량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또한 이른바 '생존가치 없는 생명', '보호가치 없는 생명'의 박탈이 일정한 사회정책의 동인이 되어서도 안된다. 생명의 박탈은 정당방위나 방어전쟁과 같은 정당한 사정이 존재할 때에만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타인의 생명을 침해한 극악한 범죄인일지언정 그 생명을 함부로 박탈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사형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결론적으로 생명을 보호하는 죄형법규는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수범자인 일반시민들에게 '타인을 살해하지 말라'는 금지규범을 제시한다. 그러나 입법자는 근원적으로 이러한 금지규범에 앞서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라'는 요구규범을 인가실존의 근본규범으로 호소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