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낙태 - 자유인가 아니면 살인인가?』, 철학연구, 53('94.11), pp.117∼133


- 기술시대의 생명윤리를 위하여 -

Ⅰ. 낙태와 도덕적 불감증

도덕에 대한 최대의 도전은 '무관심'과 '불감증'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지는 도덕의식은 일반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서 생겨난다. 무엇이 바람직한 삶인가? 바람직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 차이를 발견하곤 한다. 동물은 결코 자신의 삶과 행위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동물은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는 본능에 따라 환경세계에 적응해 가지만, 인간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환경세계를 이성적으로 지배하고 개혁한다. 본능이 필연성으로 특정지원지는 자연의 논리라고 한다면, 도덕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유의 논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삶의 의미를 묻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도덕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와 사회의 목적과 관련하여 "생존"과 "완전한 삶"을 구별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국가와 사회는 비록 단순한 생존을 위해 생성되었지만 잘 이루어진 완전한 삶을 위해 존립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배제한 단순한 생식과 생존은 비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비도덕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도덕적 규범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규범에 의거하여 특정한 행위를 '도덕적이다' 또는 '부도덕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이렇게 도덕과 부도덕의 구별은 항상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도덕규칙을 전제한다. 여기서 우리는 행위와 도덕성의 관계를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행위가 외면적으로 도덕규칙과 일치한다고 해서 이 행위의 동기를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이다. 삶의 목적과 의미에 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상황에 따라서 도덕적 규칙에 적합한 행위를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도덕적 규칙에 대한 적합성 여부가 단지 우연적으로 결정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결정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도덕규칙을 위배할 수밖에 없는 경우이다. 이런 행위는 기존의 도덕규범에 위배된다는 점에서 부도덕할지는 모르지만, 추구하는 가치와 목적이 자신의 삶에 대한 적극적 사유로부터 나왔다는 점에서 비도덕적이지는 않다 진정한 의미의 도덕적 갈등은 바로 가치와 가치가 충돌할 때에 발생한다. 도덕적 논의의 문제점은 결코 어떤 사람은 가치를 선택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무가치를 선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각기 선(善)이라고 주장될 수 있는 상이하고 대립적인 행위가 가능할 때에 도덕적 갈등은 발생한다.

현대사회는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원주의는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근본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행위의 도덕적 가치가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위를 평가할 수 없는 것인가? 흔히 사람들은 다원주의를 "절대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설명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똑같이 가치였다는 아무 것도 가치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덕적 의식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만약 가치의 상대성이 도덕적 합의의 불가능성으로 이해된다면, 다양한 가치의 공존은 결국 도덕적 무관심을 야기한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향해야 할 공동의 목적과 가치를 발견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가치의 갈등은 우리로 하여금 목적과 가치 자체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 따라서 구성원에게 다양한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개인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권을 박탈하는 현대사회의 이중적 성격은 도덕에 대한 최대의 도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양한 가치들이 충돌하고 있을 때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기술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기술을 통해 자연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의 본질을 자율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제 절대적 가치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생명의 자연성을 파괴한다. 이러한 역설적 성격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낙태이다. 낙태는 통상 법적으로는 의도적 임신중절을 의미하며, 의학적으로는 인공유산을 뜻한다. 다시 말해 낙태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는 생명제거의 기술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낙태가 기술적 행위라는 사실은 도덕에 대해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가? 둘째, 낙태 의도를 정당화하는 가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만약 기술에 의해 생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믿음이 절대화되면 오히려 인간생명의 자연성을 파괴한다는 우리의 명제가 정당하다면, 끝으로 낙태를 도덕적으로 금지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낙태에 관한 의료기술은 이제 임산부의 생명과 건강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까지 발전되었다. 임신초기에는 입원하지 않고서도 외래진료로 간단히 시술될 수 있는 의료기술의 발전은 낙태에 대한 심리적 허용도를 높힌다. 형사정책연구원의 『낙태의 실태와 의식에 관한 연구』(1991)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5.75가 임신을 하여도 반드시 낳지 않을 수 있다는 견해를 나타냄으로써 낙태를 허용하는 공감대가 보편화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연간 1백 50만(매일 4천 1백명)의 낙태건수를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낙태율에 있어 세계 제1위를 차지하고 있다. 법으로 규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낙태는 실제로 성행하고 있다. 이러한 법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법을 무력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낙태 행위에 대한 도덕적 무관심을 야기한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낙태에 관한 도덕적 무관심은 단지 기술적 발전에 의해서만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기술은 수치심의 문턱을 낮춤으로써 전통적으로 금지되었던 행위를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기술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삶과 행위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특히 낙태행위의 주체인 개별 여성은 기술발전 덕택으로 종족보존과 인구재생산의 자연적 의무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믿게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현대사회에서는 낙태의 문제에 관련하여 여성의 이해관계와 태아의 이해관계라는 담론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 낙태에 관한 도덕적 갈등은 본래 자율과 생명의 가치가 대립적으로 충돌할 때에 비로소 발생한다. 이렇게 낙태와 관한 담론은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서 "선택우선론"과 "생명우선론"으로 구별된다. 선택우선론은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로 이한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영향을 여성들이 받고 있다는 현실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면 가정내 역할이라는 기존의 역할을 변형하여야 한다는 역사적 자각에 의해 형성되었다. 반면 생명권이 다른 모든 권리에 우선한다는 초역사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생명우선론은 태아는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간이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가진다고 전제하며, 따라서 살인행위인 낙태를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사회에는 낙태결정의 주체는 여성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다. 특히 여성의 낙태결정권에 관한 수용도가 고학력을 가진 대도시출신의 미혼여성에게서 높다는 사실은 낙태가 적어도 여성해방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기실현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는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기술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가정내 역할을 선택하고 그 수행시기를 조절할 수 있을 때 여성의 영역을 가정으로 제한하는 사회제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여성의 낙태결정권의 수용도에 비례하여 낙태도 주로 "사회-경제적인 사유"에 의해 결정된다. 형사정책연구원의 『낙태의 실태와 의식에 관한 연구』조사에 의하면 첫낙태의 이유로는 미혼의 경우 사회적 비난(62.1%), 장래계획의 지장(31.1%)이 주원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낙태가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조장되고 있으며, 낙태가 또한 삶의 계획의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경제적 사유로 과연 생명에 기술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것인가? 더욱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자율이라는 이름아래 태아를 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여성은 종족보존이 인구재생산의 임무로부터 벗어나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는 것인가? 종족보존은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연성이라고 한다면, 낙태의 기술적 관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연성을 박탈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우리는 인간의 통제권으로부터 벗어난 기술의 자동적 논리에 우리의 삶을 내맡기는 행위는 비도덕적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낙태는 단순한 도덕적 문제를 넘어서서 과연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기술적 관리에 내맡길 수 있는가 하는 존재론적 물음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출발하여 아래에서 우리는 낙태를 정당화하는 시몬느 도보부아르의 여성해방론의 논리를 살펴보고, 왜 기술시대에 생명의 윤리가 필요한가를 논거하고자 한다.

Ⅲ. 인간공동체와 생명권

모든 도덕적 의식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낙태에 관한 도덕적 논의도 우리 문화에 내재하고 있는 도덕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현대사회는 여성해방론자들이 추구하는 바와 같이 모든 인간은 도덕적 행위의 주체로서 평등한 인격적 존엄성을 가진다는 이념과 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개인은 자율적 결정의 권리를 가지며, 동시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의무를 가진다. 현대의 민주사회는 이런 관점에서 개인을 인간이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부여되는 인권의 주체로 파악한다.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결코 단순한 대상과 수단으로 다루어서는 안되며, 항상 주체와 목적자체로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에 의해 도덕적 행위의 정언명법으로 서술된 이 명제는 동시에 인간실존에 관한 방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어떤 이유에서도 침해될 수 없는 실존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가 모든 영역에서 인권을 실현하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을 인권의 담지자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동류로서 파악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식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대개 죄없는 생명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데 합의한다. 그러나 여기서 생명은 권리와 의무를 보유하고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격체이다.


따라서 낙태에 관한 도덕성 문제는 "태아를 과연 하나의 인격체로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압축된다. 만약 인격에 관한 사회적 인정이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한다면 어린 아이, 노인, 정신박약아는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태어나지 않은 태아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생명체가 언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생명체의 사회적 인정에 관해서는 두가지의 상반된 입장이 존재한다. 생명우선론은 수정된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은 실존의 권리를 가진다고 전제하면서 종에 대한 귀속성은 인간의 생명권을 정당화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낙태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고자 하는 선택우선론은 의식을 가지고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비로소 인격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반박한다. 다시 말해 '호모 사피엔스'(Home sapiens)라는 종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생명보호의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데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생물학적 사실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생명윤리를 정면에서 반박한다. "우리의 종과 결합되어 있는 생물학적 사실들은 어떤 도덕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생명체가 단지 우리의 종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생명에 특권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인종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인종차별주의의 입장에 빠질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를 부정한다면, 종귀속성을 생명권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고 피터 싱어는 단언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권은 오로지 도덕적으로 의미있는 특성과 능력에 의해 정당화된다. 이런 맥락에서 피터 싱어는 인격의 개념을 자기의식을 보유한 합리적 존재로만 이해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의 순간적인 실존을 넘어서는 욕구와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욕구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자기동일성의 의식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인격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의식과 합리성은 육체와 생명에 우선하는 가치로서 파악되고 있다.

인격은 산다는 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미래의 삶을 합리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 주체이다. 모든 인격은 계속 생존하고자 하는 희망과 의욕을 가지며,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지속적 생존을 의욕할 수 있는 능력은 생명권을 정당화할 수 있는 필연적 전제조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체의 아직 자기 의식과 지각능력을 갖추지 못한 신생아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격체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피터 싱어는 태아가 잠재적 인간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권리는 가능성을 근거로 정당화될 수 없는 까닭에 태아가 인간존재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명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 개인이 실제적 지위를 토대로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를 다른 개인이 단순히 가능성만으로 똑같이 보유할 수 있다면, 권리는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생명권은 의식의 형성과 더불어 비로소 형성된다는 관점은 이렇게 자율적 선택우선론의 토대가 되고 있다.


반면 생명의 윤리는 인간이 생식을 통해 종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자연의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생명의 윤리가 자율의 논리에 대해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왜 인간은 종족 귀속을 토대로 생명권을 선천적으로 가지는가를 근거지워야 한다. 만약 인간의 실존을 공동체에 대한 참여의 능력으로 규정한다면, 인격적 존재는 인간에게 있어 속성의 성격만을 가질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인격체로 만드는 특성은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아가 지각능력과 독립적 생명을 가지지 못하는 한에서 낙태를 허용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우리는 자유인과 노예의 구별척도였던 이성의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인간은 우연적 속성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실존을 근거로 인간으로서 대접받을 수 있는 권리와 존엄을 지닌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지는데는 다른 활동과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도덕적, 공동체적 활동이 인간을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촌적 인격성이 비로소 공동체의 도덕적 성격을 결정한다. 출생, 신분, 인종, 발육과 건강의 정도가 인간의 인격성을 규정하지 않는다. 만약 자율적 선택론자들이 이성의 평등적 성격을 인정하고 동시에 이성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이라는 자연적 종에 속해있다는 사실은 생명권의 충분한 근거이다. 따라서 생명의 윤리에 있어서 "살만한 가치가 없는 생명"은 자기모순적 개념이다. 환자, 정신박약자, 노인, 신생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체는 모두 평등하게 생명권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태아가 수정의 순간부터 이러한 인격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임신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파악하여 인간생명 이전의 상태를 상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물론 인간형성의 초기단계에서 인격의 형태와 독립성을 경험적으로 인지할 수 없음은 사실이지만, 현대의학은 수정의 순간부터 이미 태아는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마치 성인의 자기동일성이 서로 독립된 요소에 의해 파악되지 않고 하나의 연속적 과정(역사)으로 표현되듯이, 인간형성의 과정도 역시 하나의 연속적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의식과 의사소통능력이 과정의 끝에 가서 고정적으로 형성되지 않듯이 인격은 수정의 순간부터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성장과정에서 받은 충격은 인격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어떤 발전단계에 있어서건 모든 침해행위는 개인의 정체성과 전체의 삶에 영향을 준다. 태아의 단계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인격을 전체로서 파악하고 또 우리 삶의 전체 과정에서 정체성을 확인한다면, 태아도 역시 하나의 독립적 인격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낙태를 도덕적으로 판단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태아가 과연 인격적 생명체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우리가 인간을 그의 자연적 인간존재를 토대로 인류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기준과 능력의 조건을 붙일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압축된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윤리를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선택론의 입장을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인간의 존재, 즉 생물학적 사실은 도덕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와 사실이 동일시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존재와 사실이 동일한 것이라면 인격을 규정하는 특성과 능력들도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무의미하다. 선택론자들이 핵심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의식보지자"라는 특성도 역시 하나의 사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특정한 능력과 성격을 보유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결코 아니다. 생명권 보호의 근거는 인간존재에 근거하지 결코 특정한 능력, 성격, 업적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가 사실에 우선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존재는 결코 경험불가능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존재는 인간의 신체성과 신체적 실존의 연속성을 전제한다. 구체적 실존으로서 이 세상의 특정한 공간을 점하고 있는 인간 존재는 자신의 실존을 근거로 생명의 권리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Ⅳ. 자유의 실현과 생명윤리

모든 도덕적 문제가 그렇듯이 생명윤리는 자유와 자기실현의 가치를 추구하는 현실과 불일치의 관계에 있다. 특히 생명의 윤리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아의 낙태와 회태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여성해방론과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여성의 낙태결정권을 지지하는 선택론자들은 낙태의 법적 금지를 일종의 임신강요로 받아들인다. 과연 법과 국가는 임신과 출산에 관한 개인의 자율권을 침해할 수 있는가? 현대사회에서 자율권이 민주주의의 근본가치로 인정되고 있다면, 여자는 임신과 출산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인가? 자유주의 발생은 사적인 영역이 점차 중앙의 통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화되는 과정과 맞물려있다.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질적으로 개인의 사적인 결정에 달려있다. 따라서 자유주의 국가는 결코 사람들이 입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간섭을 하지 않는다. 짧은 치마를 입었다고 해서 법적으로 제재할 수 없고, 머리가 길다고 해서 처벌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유주의 국가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한편으로는 공공질서를 보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의 사생활을 보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혼과 가족계획은 전적으로 개인의 사생활에 속한다. 물론 국가는 정책적인 배려에서 산아제한을 유도할 수 있는 동인을 부여하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적극적인 인구확대정책을 펴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강요될 수 있는 재생산의 의무는 존립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카톨릭교회도 생식기능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면 성(性)을 인정한다. 성행위는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행위의 일부이기 때문에 생식의도가 없다고 해서 부도덕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낙태는 근본적으로 생식의 의도가 없는 성의 문제로 환원된다. 만약 재생산의 의도가 없는 성생활을 하나의 가치로 인정하거나 또는 자기실현의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미래의 인간에 대한 존재를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자유주의적 입장은 우리가 앞으로 아이를 가질 것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스스로 결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임신의 자율권이 결코 낙태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인구가 너무 과다할 경우에 낙태를 인구조절의 수단으로 허용하는 아리스토테렐스의 견해는 오늘날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낙태는 결코 책임있는 인구조절의 정책적 수단이 될 수 없다. 사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구조절은 생명의 보호와 복지의 증진이라는 차원에서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다. 인구문제는 인간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생식행위를 인구조절의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가 법적으로는 개인의 낙태행위를 규제하는 것으로 나타나나 인구정책적으로는 이를 묵인 조장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러나 인구조절은 우리가 기술적, 정책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영역에만 국한된다. 실존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서-탄생전의 생명체도 마찬가지로 실존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서-탄생전의 생명체도 마찬가지로 실존하고 있는 인격체이다-우리는 어떤 소유권과 간섭권도 보유하지 못한다. 인간존엄을 침해하지 않고서는 인간에 대한 소유가 결코 관철될 수 없는 까닭에 낙태는 결코 인구조절의 수단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태아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고 무책임하게 이를 살해하고 있다는 경험적 사실은 도덕적 가치가 타당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혹자는 낙태가 현실적으로 성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법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여성을 범죄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명제가 타당성을 획득하려면, 낙태가 범죄가 아니라는 사실이 전제된다. 범죄를 행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행위가 어떻게 범죄화가 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국가는 낙태를 조장하는 인구 정책을 수정하고, 법현실과의 괴리를 제거할 수 있도록 낙태규제 관련법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인구문제와 직면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생명체에 대한 도덕의식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낙태와 피임의 개념을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 낙태와 피임은 모두 생식과정에 대한 인공적 간섭이라는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같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낙태와 피임 사이에는 엄청난 도덕적 차이가 존재한다. 피임은 "아직 실존하지 않는 생명체"에 대한 기술적 행위이지만, 낙태는 엄연히 실존하고 있는 생명체에 대한 기술적 행위이다. 낙태는 분명 살인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국가에 의해 보호되어야 할 자율권은 단지 피임에만 적용된다. 오늘날에도 성생활과 임신여부에 대한 자율적 결정은 예나 다름없이 개인의 사적 생활에 속한다. 물론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전통사회에서는 낙태가 유일한 피임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학과 기술이 발전한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능력 안에 있는 피임법을 사용하지 않고 낙태를 한다면, 이는 분명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무책임한 행위이다.


그 방법이 비자연적이라는 관점에서 낙태와 피임을 모두 거부하는 보수주의적 입장은 현대사회의 핵심적 문제인 인구팽창을 간과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낙태를 대단치 않은 일로 여기는 반대현상을 초래한다. 제3세계의 식량문제와 기아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피임에 대한 포괄적 부정은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의 인간다운 삶을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자연성은 도덕적 행위를 판단하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낙태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있어 적용되는 유일한 원리는 "생명체의 인격적 의미"이다. 물론 이 경우에 자연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낙태는 자연적 조건에 의해 인격적 실존의 실제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생명체에 해당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적 결함에 의해 하나의 인격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존립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시 말해 특별한 사유로 말미암아 인류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인식될 때에도 낙태는 허용되지 않는 것인가? 이런 경우들이야말로 도덕원리를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낙태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발생하는 진정한 의미의 갈등상황이다. 여기서도 기준은 이미 살아있는 인격적 생명체의 우선성이다. 따라서 태아를 살해하지 않으면 엄마와 아이의 생명이 모두 위험할 경우에는 분명하게 낙태가 정당화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태아가 인간적 삶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의 결함을 가졌을 경우에 낙태는 정당화될 수 있다. 결국 낙태에 도덕적 판단의 척도는 인격적 생명체와 인간다운 삶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 하는데서 발생한다. 인간의 삶에는 자연적으로 부여된 생명의 권리와 더불어 사회적 인정과 수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전자가 인간의 자연적 실존조건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사회적, 문화적 실존조건이다. 물론 우리는 "살만한 가치가 있는 생명"의 기준을 미리 정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낙태를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사회적 수용과 인정은 그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심리적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충분히 예견되는 비인간적 삶을 미연에 방지하는 낙태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이 처음부터 배제된 생명의 경우에는 낙태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는 어떤 이유에서도 이미 실존하고 있는 생명체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그렇다면 중대한 장애로 인해 심한 고통을 당하고 오래 살지도 못한다는 것을 충분히 예견하면서도 낙태를 거부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난할 수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실존을 무의미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인간이 왜 실존하고 있는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특정한 사람의 실존가치를 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한 생명체가 여러 사유로 인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예츨될 경우에- 예컨대 강간당하여 임신한 경우와 유전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것이 예상되는 경우-행해지는 낙태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서될 수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경우에 용서될 수 있다고 해서 태아에 대한 살해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실현은 오히려 낙태행위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여건을 제거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사회적-경제적 여건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다면, 우리는 이러한 여건을 개선해야지 죄없는 태아를 살해해서는 안된다. 사실 우리나라는 소위 말하는 "비정상적 삶"에 대한 사회적 관용도가 높지 않다. '애비없는 자식'은 장애자와 마찬가지로 종종 완전한 사회적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 인간이 이미 공동체속으로 태어났다면, 우리는 구가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적극 도울 의무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사회적 연대성이지, 결코 낙태의 합법화가 아니다. 도움을 줄 생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태아를 지우라고 권한다면, 이러한 사회가 과연 인간존엄이 실현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살만한 사회는 인간이 아무런 조건없이 인간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러나 낙태를 정당화하는 다양한 사유들은 인간실존에 영향을 주는 조건들이다. 만약 죄없는 생명의 실존이 사람의 장애로 여겨지고, 또 낙태가 자율의 전제조건으로 파악된다면, 이는 분명 비도덕성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생명의 자연성을 파괴하는 제요건을 개선할 수 있고, 동시에 생명의 윤리에 부합하는 기술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