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명경시 풍조를 개탄한다(pp.7~9)
한 나라, 한 사회의 도덕적 건강상태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각자 얼마만큼 서로 남을 존중하고 남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 먼저 남을 대접하고자
할 때 인간관계 속에 신뢰가 싹튼다. 신뢰없는 사회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이리'상태와도 같다. 남을 먼저 물고 뜯지 않으면 자신의 생존을
지탱할 수 없는 혼돈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에게 질서 있는 사회의
원리가 될 황금률을 가르쳐 주고 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먼저 남을 대접하라"(마7:12).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이같은 황금률조차 통하지 않는 삭막한 사회속에서 마치
이리떼들처럼 각자의 탐욕과 이기심을 채워 줄 희생양들을 찾아 쏘다니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미 충격적인 살상과 탐욕적인 어린이 유괴
살인, 성폭행, 임신매매 등의 범죄가 우리사회의 위험수위를 넘어 안방까지
범람하고 있다.
지난 8월 22일 공중전화박스에서 통화를 하던
청년이 뒤에서 빨리 전화를 끊으라고 재촉하는, 갓난애를 업은 주부에게
흉기를 휘둘러 살해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뒤이어 공중전화에서
연속 두 통화를 계속했다고 안경이 부서지도록 때려 실명케 한 사건,
공중전화를 걸 잔돈을 요구하다 이를 거절하는 행인을 폭행한 사건,
자신이 걸다 남은 돈으로 통화를 하는 행인에게 허락도 없이 전화를
건다며 각목으로 폭행을 가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행태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너나 할 것 없이 너무나 조급하며 남을 헤아려 이해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다. 따라서 끔찍한 범죄행위 배후에 숨어있는
범인의 동기조차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하찮은 이유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극히 충동적이고 어느 누구를 가릴 것없이 마치 쏟아지는
태양빛 때문에도 살상하는 이방인들을 연상케 한다.
하도 답답하여 일전엔 대학에서 만난 노교수님께
물어 보았다. "우리 국민들의 심성이 원래 조급하고 척박했던가요?"
이미 10여년 전에 정년퇴직하신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선생님
당신은 성품이 넉넉하여 늘 느리다는 핀잔을 들으며 지내왔는데, 최근
큰아들이 불면증에 시달려 직장까지 그만 두고 집에 함께 들어 앉으니
마음이 그렇게 조급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대화를 마치고 책상머리에
앉을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이 시대 우리의 사회가 마치 '병든 자식을
두 노부모'의 형상에 비유할 수 있을 듯 싶다는 것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9살난 희성군을 유괴살해한
뒤 하루에 몇 차례씩 전화를 걸어 희성군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2천만원을
요구한 사건하며, 5살박이 완희군을 유괴살해한 뒤 저수지에 버리고
애태우는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3천만원을 요구한 20대 부부이야기가
하루가 멀다하고 신문의 사회면을 어둡게 채운다.
도대체 누구를 신뢰하고, 길을 걸으며 택시를
탈 수 있단 말인가. 추가요금을 낼 수 없다고 항의하는 여성을 요금대신
성폭행으로 분풀이한 운전기사며, 새벽에 혼자 버스를 타고가는 여성을
으슥한 곳으로 몰고 가 성폭행한 버스운전사의 이야기는 이미 우리 사회에는
인간간의 신뢰의 기초가 뒤흔들리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인간은 각자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성을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목적 그 자체로서 실존한다. 인간은 타인과
더불어 사는 공동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목적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지
다른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일찍이 칸트는
이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정언명언을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에서건 타인의 인격에서건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지,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행동하라." 인간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또는 육욕의 대상물로 사용하는
사람은 이미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는 자가 아니라 단지 물건이나 동식물로
전락시키는 자다. 그는 이로써 다른 사람만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비인간적인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귀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다.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그 목숨을 잃어 버린다면 참으로 그 얻은 것이 이 목숨
하나만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흔들리는 사회는 혼돈과 붕괴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이 다른 모든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보호받는 사회는 비록 일시적으로 심각한 병리적 현상을
안고 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극복하고 생동감과 활기 넘치는
공동체 삶을 이끌어 내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상이 난무하는 사회야말로 하나님 앞에 패괴하는
강포가 땅에 충만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갖가지 살상이 범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인줄로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대량의 살상이
벌어지고 있다. 연간 85만 내지 1백만명의 태아가 소리도 없이 산부인과
병실 또는 그 밖의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저 죄없는 생명들이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는
고통소리를 들어보라.
물고 물리는 싸움판, 죽느냐 사느냐의 살벌한
인생의 싸움판에서 우리는 각자의 흉기를 숨긴채 사람의 사람됨이 무엇이어야
하느냐에 관한 윤리적 가치기준이랑 아랑곳하지 않고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라고 할 것도 없이 극도의 이기주의와 불신 속에 버려진 삶을 이끌고
있지는 않은지.
이제 우리는 다시 근본적으로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 혼자만이 아니라 온 겨레가
찢기고 황폐화한 병든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회개하고 용서받음으로
나음을 입어야 할 절박한 때다. 나 개인의 평안함으로 즐거워하지 말고
세상에 공평과 의가 없음으로 인해 애통할 줄 아는 심령이 되어야겠다.
65년만의 홍수로 한강은 범람하고, 기름 졌던
땅은 흙탕물속에 뒤범벅이 되어 버렸다.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쓸어가 버린 이 재난은 불과 2,3일 간의 집중호우로 빚어진 것이다.
컴퓨터가 댐수문조절식의 홍수예방도 한계에 부딪혀 우리는 얼마나 마음졸인
밤을 지새웠는가. 이 참담한 재난 앞에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을
끓고 그 재난과 고통의 의미를 더듬어야 할 때다.
노아시대처럼 이 땅위에 우리의 죄악이 관영했고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진정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충만하지
않았는지, 이 땅에서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하지 않았는지,
복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 이 땅위에 사는 우리의 죄악이
관영함으로 인해 한탄하시고 계시지는 않으신지.
이제 강포와 불의를 마음에서 씻어 버리고 온유한
자의 심령으로 돌아가야겠다. 땅을 기업으로 받아 누릴 자들은 오직
마음이 온유한 자들이겠기에 말이다. (신앙계 19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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